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731 부대 (문단 편집) === 하바롭스크 재판 === 하바롭스크 재판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군의 4년간의 자료 수집과 준비를 거쳐 1949년 12월 25일부터 30일에 걸쳐 소련 하바롭프스크의 장교 회관에서 일본군 전범 피고에 대해 6일간 열렸던 군사 재판이다. 재판에 회부된 일본인 피고들은 소련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관동군 지도부와 생체실험 및 세균전 관계자들이었으며 소련에 대한 침공 계획인 관동군 특종연습, 대소련 공격에 대한 내용도 다루어졌다. 피고인들은 모두 강제 노동형 실형 판결을 받아 그대로 [[시베리아]]에 교정 노동 수용소에 억류되어 형을 살다가 1956년 소련-일본 공동선언 체결에 의한 양국 국교 회복으로 감옥에서 병사하거나 자살한 이를 제외한 모두가 특별 사면으로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피고인과 판결''']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관동군 12명의 판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야마다 오토조(山田 乙三)''' 관동군 총사령관 [대장] - 강제노동 25년 형 > 1956년 일본-소련 국교회복으로 특별사면 > * '''카지즈카 류지(梶塚 隆二)''' 관동군 군의부장 [중장] - 강제노동 25년 형 > 1956년 일본-소련 국교회복으로 특별사면 > * '''다카하시 다카아츠(高橋隆篤)''' 관동군 수의부장 [중장] - 강제노동 25년 형 > 1952년 뇌출혈로 사망 > * '''사토 슌지(佐藤 俊二)''' 관동군 제5군 군의부장 [소장] - 강제노동 20년 형 > 1956년 일본-소련 국교회복으로 특별사면 > * '''카와시마 키요시(川島 清)''' 제4부 세균 제조 부장 [소장] - 강제노동 25년 형 > 1956년 일본-소련 국교회복으로 특별사면 > * '''카라사와 토미오(柄澤十三夫)''' 제4부 세균 제조과 과장 [소령] - 강제노동 20년 형 > 1956년 수용소에서 자살[* 1956년 10월 19일 일소 공동선언에 의한 특별 사면 발표가 나왔지만 10월 20일 소련 제48 장교 수용소의 빨래터의 기둥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 * '''니시 토시히데(西 俊英)''' 제4부 세균 제조과 과장 [소령] - 강제노동 18년 형 > 1956년 일본-소련 국교회복으로 특별사면 > * '''오노우에 마사오(尾上 正男)''' 731부대 하이린/무단장 지부장 [소령] - 강제노동 12년 형 > 1956년 일본-소련 국교회복으로 특별사면 > * '''히라자쿠라 젠사쿠(平桜全作)''' 100부대 연구원 수의사 [중위] - 강제노동 10년 형 > 1956년 일본-소련 국교회복으로 특별사면 > * '''미토모 카즈오(三友 一男)''' 100부대원 [중사] - 강제노동 15년 형 > 1956년 일본-소련 국교회복으로 특별사면 > * '''키쿠치 노리미츠(菊地則光)''' 731부대 하이린/무단장 지부 의무병 - 강제노동 2년 형 > 1951년 소련에서 석방 > * '''쿠루지마 유지(久留島祐司)''' 731부대 린커우 지부 의무병 - 강제노동 3년 형 > 1952년 소련에서 석방 731 부대의 잔인한 행위는 현재 [[전쟁범죄]]로 공표되어 있다. 하지만 절반 가량인 25명이나 사면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소련에 12명, [[중국공산당]]에 13명(헌병대장들까지 포함)이 잡혀서 하바롭스크에서 재판을 받고 푸순전범관리소에서 심문을 받고 시베리아 유형 6년 강제노동형, 만주의 푸순 유형 6년에서 10년 노동교화형에 처해졌다. 당시 [[공산권]]의 추운 지역 강제노동형과 노동교화제도는 [[사형]]보다 더 끔찍한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